2009년 08월 10일
칸트를 따라 철학하기
Wollten sie dagegen ihr Geschäft nicht als Wissenschaft, sondern als eine Kunst heilsamer und dem allgemeinen Menschenverstande anpassender Überredungen treiben, so kann ihnen dieses Gewerbe nach Billigkeit nicht verwehrt werden. Sie werden alsdann die bescheidene Sprache eines vernünftigen Glaubens führen, sie werden gestehen, daß es ihnen nicht erlaubt sei, über das, was jenseit der Grenzen aller möglichen Erfahrung hinausliegt, auch nur einmal zu mutmaßen, geschweige etwas zu wissen, sondern nur etwas (nicht zum spekulativen Gebrauche, denn auf den müssen sie Verzicht tun, sondern lediglich zum praktischen) anzunehmen, was zur Leitung des Verstandes und Willens im Leben möglich und sogar unentbehrlich ist. So allein werden sie den Namen nützlicher und weiser Männer führen können, um desto mehr, je mehr sie auf den der Metaphysiker Verzicht tun; denn diese wollen spekulative Philosophen sein, und da, wenn es um Urteil a priori zu tun ist, man es auf schale Wahrscheinlichkeiten nicht aussetzen kann (denn was dem Vorgeben nach a priori erkannt wird, wird ebendadurch als notwendig angekündigt), so kann es ihnen nicht erlaub sein, mit Mutmaßungen zu spielen, sondern ihre Behauptung muß Wissenschaft sein, oder sie ist überall gar nichts.
Immanuel Kant, Prolegomena zu einer jeden künftigen Metaphysik ,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önnen , s. 278-279,
반대로 그들이 그들의 작업을 학문이 아니라 건전한고 일반적인 인간 오성에 적합한 웅변의 기술로 수행한다면, 공정하게 봐서 그들의 직업은 거부될 수 없다. 그 때 그들은 이성적인 믿음에 적합한 점잖은 말을 할 것이며, 모든 가능한 경험의 경계 바깥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아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러쿵저러쿵 추측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것, 대신 오직 삶에서 오성과 의지를 지도하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러한 것으로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을 (사변적인 사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실용적인 사용을 위해서, 왜냐하면 사변적인 것을 그들은 포기해야 하기에) 추측하는 것만이 허락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서만 그들은 유익하고 현명한 인간의 이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형이상학자의 이름을 포기할수록 더. 왜냐하면 형이상학자들은 사변적 철학자이고자 하기 때문에, 그리고 선험적 판단이 문제가 될 때 인간은 그것을 케케묵은 그럴싸함에 내맡겨 버릴 수 없기 때문에(거짓말에 의해 선험적으로 인식된다 주장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에 필연적인 것으로 선포되는 것이기에), 형이상학자들은 추측을 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주장은 오히려 학문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주장은 도대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 <<학문으로서 등장할 수 있을 모든 미래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 278-279쪽.
여기서 칸트가 인간 오성에 '적합한', 겸손한 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칸트가 사회적 상식에 합치하는 건전한 주장들을 펴면서 스스로 철학자 연 하는 도덕가들, 오늘날에도 찾아 보기 어렵지 않은 그런 인물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인간 오성에 '호소력을 갖는' 웅변의 기술을 가르친 이들은 소피스트들이었고, 프랑스의 반항적 리베르탱들이었다. 그들은 권위와 미신에 반하여 인간 오성에 적합하며, 인간의 삶을 더 낫게 이끄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미에서 건전한 교설들을 설파했다. 따라서 칸트가 가리키는 대상은, 천박하고 유치한 도덕가들뿐만은 아닌 것이다. 칸트는 이들의 존재가치를 인정한다. 다만, 그들은 학자로서는 무가치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칸트의 교설이 실제로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
칸트의 교설을 수용하고, 발전시킬 것을 제창했던 사람들, 쉴러나 피히테의 생각은 칸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학문이라 인정할 수 없을 것이었고, 오히려 삶을 이끈다는 실용적인 목적에나 도움이 될 것으로서, 여기서 칸트가 비판하고자 하는 태도와 어느 면에선 유사하다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칸트가 18세기 속에서 끄집어낸 이 사이비 철학자들의 모습과 그들은, 후자가 인간 오성에 적합하며 건전한 교설들을 오히려 배격했다는 점, 칸트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상식적인 사고로부터의 이탈을 그 사고의 핵심에 두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칸트가 건전한 상식으로 이루어진 삶의 기술들과 비상식적인 인식들로 이루어진 학문을 구분하자, 이제 삶의 기술 자체가 비상식적인 사변이 되어버렸다.
칸트는 스스로가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분기점이나 미래의 모든 사유의 준거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확실히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으나, 그가 원하던 대로는 아니었다. 그는 형이상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그가 이 서설의 서두에서 썼듯이 그 이후 젊은이들은 과거의 철학에 대한 주석이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여 하나의 철학을 정립시키고자 했으나 그것은 칸트가 인정하려 했을 그런 철학은 아니었다.
# by | 2009/08/10 22:49 | Ideencollage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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