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9월 19일
병역거부자와 병역기피자를 구분하는 방법
둘을 애써 구분하는 것은, 대체복무제라는 새로운 제도에 대한 사회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긴 하다. 이 둘은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명칭에 대한 개념적 분석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의미에 따라- 병역거부자는 종교 또는 그 외의 신념에 따라 군사 훈련을 거부한 이들이고, 자신이 믿는 바를 지키기 위해 그에 따른 사회적 불이익 역시 감수할 각오를 가진 이들이다. 반면에 병역기피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병역을 피하려 하는 이들이지만,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 편법을 사용하여 법의 그물을 피해 나간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구분은 사실은 매우 취약하고, 불명료한 것이다. 종교, 다른 신념과 이기적인 이익 추구를 구분할 수 있는 선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익에 대한 추구는 신념으로, 그리고 신념이나 종교 역시 이익에 대한 추구로 언제나 환원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신념'이라면 그 만큼의 '각오'를 보이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숱한 사람들이 그러한 각오를 보여 왔다. 지금은 1년 6개월의 형기로, 그리고 예전 군사정권 시절에는 회유를 위한 모진 폭력에 굴하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이제야 법의 영역에서 그 각오는 작은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처럼 종교에 따른 병역거부-지금 도입된 법은 종교를 이유로 하는 병역거부 만을 인정하고 있다-가 법적으로 인정될 때 발생한다. 병역기피자들과 병역거부자들을 구분할 방법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애초에 병역거부자들과 병역기피자들을 구분할 수 있는 방안은, 법에 의한 처벌, 그리고 직접적인 폭력이라는 리트머스지를 이용하는 것 뿐이었는데 그것이 없으면 병역기피자들과 병역거부자를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내밀한 양심을 판별해 낼 수 있는 존재, 신 뿐이다. 그러니 '대체복무제는 수많은 병역기피자들에게 악용될 것이다.'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현재 발표된 대체복무제는 병역기피자들을 걸러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않으니 더 고된 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바꾸어 말하면 예전처럼 '각오'를 볼 수 있게끔 해 보자는 것이며, 또 다시 '처벌'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과도한 대체복무제라고 하더라도, 범법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떄문에 엄밀히 말하면 처벌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일신의 편안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군복무를 택해야 할 정도로 강력한 징벌적 성격을 갖는 제도이다. 제도적 인정을 초과하는 그 여분의 '징벌'이 신념의 순수성을 입증해 줄 것이다.
인간의 은밀한 내적 욕망을 국가의 폭력을 통해 검증해 내고자 하는 이런 생각은 그 논리에서 고문과 아무런 차이도 없다. 아무런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결코 증거를 찾아낼 수 없는 상황에서 진짜 속내를 밝혀 내기 위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행되는 고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문은 다음과 같은 사고를 통해 정당화 된다. 한국은 군대를 필요로 하는데, 병역기피자는 군대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국가의 안위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이런 '합리적'인 사고에 따라 병역거부자를 병역기피자로부터 걸러 내기 위한 '폭력'이 정당화 된다. 하지만 같은 논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도 충분히 이끌어 낼 수 있다. 병역기피자 뿐만 아니라 병역거부자도 국가 안위에 대한 위협이며, 나아가 이들을 만들어 내는 종교나 사상 역시 안보에 위협이 되므로 이를 법적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이것이 국가의 안전이라는 당위의 논리적 귀결이다(그리고 이것이 한국에 국가보안법이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것을 원하는 사람은 많아도(어젯밤도 술 마시며 한탄했을 해병대 전우회 여러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게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게 극단적으로까지 자신의 논리의 '순수성'을 밀고 나가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느 선에선가 민주주의의 논리적이고 윤리적인 장벽에 부딪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병역거부자(그리고 기피자)들에게 하는 순수성에 대한 가혹한 입증 요구를, '정책적 합리성'에 의거해서 정당화 한다. 기실 자신들의 합리성 역시 민주주의의 한계 속에서 그 순수성이 좌절될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타협에 대한 망각은 자신의 합리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그리고 자신의 윤리적 위치를 안전한 것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병역거부자를 만들어 낸다는 이유로 특정 종교나 사상에 벌을 가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허용하는 것을 넘어선다고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병역거부자와 병역기피자를 구분하기 위해 요구되는 징벌 역시 민주주의가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여분의 징벌은 그 논리에서 고문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 주장을 할 때,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신을 고문하는 자와 같은 위치에 서게 만들 수도 있는 그 말에 윤리적인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는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서슬퍼렇게 병역거부자의 각오를 시험하려고 들기 전에 말이다.
<보충> 법의 폭력성에 대해서: 파스칼, <<팡세>>
"관습은 단지 이것이 공인되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정의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관습이 권위를 가지게 되는 신비스러운 근거가 된다. 관습을 그 근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것을 파괴하는 셈이다. 오류를 내세우는 법보다 더 그릇된 것은 없다. 법이 정의롭기 때문에 그것에 복종하는 사람은 자기가 상상하고 있는 정의에 복종하는 것이지 법의 본질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법은 그 자체 속에 모든 것을 끌어 모은다. 그것이 법이며,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 가장 현명한 입법자들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들을 속일 필요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정치가는 이렇게 말했다. 해방감을 주는 진리를 찾고 있는 인간에게 거짓도 유익하다고 믿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강탈에 관한 진실은 폭로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과거에는 아무런 근거 없이 도입되었지만 지금은 합당한 것이 되었다. 우리는 그것이 진정하고 영원한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곧 끝장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의 기원을 감춰진 상태로 두어야 한다."
# by | 2007/09/19 04:47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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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불복종 행위은 기본적으로 비폭력과 처벌 감수라는 두 개의 조건 위에서만 성립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행위자의 사익이 아닌 사회 전체의 공익을 위한, 체제 내에서의 변혁 요구 투쟁이라는 행위의 정당성을 인정받죠. 처벌 감수 부분이 사라지면, 위에 쓰신 대로 병역 거부자와 병역 기피자를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또 (윗글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비폭력 운동 부분이 사라지면, 병역 거부자와 테러리스트(혹은 자유의 투사)를 구분할 수 없게 되죠. (둘 다 사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투쟁(한다고 주장)함.)
그리고 3번째 문단까지의 논리가 "병역 거부자들을 만들어 내는 종교나 사상이 안보에 위협이 되므로 이를 법적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반드시 귀결되지는 않습니다. 논리적 귀결은, "그 해당 종교나 사상을 보유한 사람이 그것들로 인해 형성된 내적 신조로 인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기본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가 되겠지요. 즉, 시민의 일원으로서 얼마든지 해당 종교나 사상을 향유할 수 있고, 시민으로서 법적 처벌만 감수하면 거부 행위를 할 수도 있고 안보에 위협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말장난 같지만, 때문에 처벌 감수 부분이 중요합니다. 시민 불복종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 다수의 공감대를 유도해 해당 법이나 정책 등 체제 변혁을 목표로 삼거든요. (병역 기피 등 자신만의 사적 문제가 아니라.) 불복종 행위자가 사회적 공감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 때만, 비로소 법이나 정책 등은 바뀝니다. 불복종 행위가 민주제 하에서 다수 구성원들의 총의로 제정된 법을, 소수의 견해에 의거해 변화시키는 비민주적 절차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공감대 호소 절차를 통해 다수의 총의를 변화시킴으로써, 오히려 대의 민주제의 한계를 보완하는 입법 보조 수단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거든요. 때문에 체제 내의 대안으로서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시민 불복종 운동은 전통적으로 비폭력적인 방법과 처벌 감수 절차를 중시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나 양심, 도덕 법칙들이 자기방어 목적 이외의 폭력을 부정하고 응보 개념을 중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따라서 법적 처벌 감수는, 행위자의 기본권인 양심의 자유를 침해(공개 강요)하기 위한 (불필요한) 고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민주제 하에서 시민 불복종 운동이 대의민주제 입법 절차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로 존재할 수 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정 전의 불복종 행위에 대해서는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당시 현행법에 따라 처벌 받기 때문에 비로소 '시민' 불복종 행위가 되는 겁니다. 시민 불복종 행위자는 그를 통해 소속 사회의 법과 체제와 절차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 신뢰를 증명하지요. 시민 불복종 행위자의 처벌을 반대하는 주장은 오히려 시민 불복종 운동의 정당성을 기반부터 무너뜨릴 위험한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반론 환영합니다.
그렇지만 글을 쓰면서 시민 불복종과 처벌 간의 관계에 대해서 rainkeeper님과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처벌이 없다면 시민 불복종은 운동으로 성립하지 않지요. 저와 rainkeeper님의 차이는 그 상황을 바라보는 시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적으신 것처럼 시민 불복종 운동은 처벌을 통해 여론을 움직여 보려고 하는데, 그 때 전제되는 것은 여론이 처벌에 대해 윤리적으로 옳거나, 옳지 않다고 판단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여론이 '처벌이라는 것이 있어야 시민 불복종 운동도 '기능'하지'라고 말해 버린다면 시민 불복종 운동은 성립하지 않지요. 그렇게 보면 시민 불복종 운동의 성립을 위해서는 고문 뿐만 아니라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윤리적 요구가 필요한 셈이네요. 그런데 동시에 양자택일적인 윤리적 요구는, 시민 불복종 행위와 고문이라는 상황에서 기능주의적 관점을 취할 수 있는 객관적 거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지적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보고 답글을 달거나, 아니면 글을 수정하거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야고버/ 아, 제가 첫 리플이었군요. 개장 축하드립니다.
비공개/ 노땡쓰베이비
먼저 첫 문단 관련. 저는 님의 논의를 시민 불복종 행위에 대한 사회적 대응(대체복무제)에 내포된 처벌, 그러니까 그 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로 생각했습니다. 병역이라는 이미 합의된 사회적 폭력(개인의 기본권의 일시적인 침탈)을 거부하는 사회 구성원에 대한 대안 폭력의 정당성 문제. 좀 더 원론적으로는 개인의 신념과 사회의 신념의 충돌과 조화 문제. 양심의 자유라는 기본적인 권리와 국방의 의무(정확히는 병역 의무)라는 기본적인 의무 사이의 충돌.
그리고 '현행 대체복무제는 병역거부에 대한 사회적 인정임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님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넓게 보면 법은 결국 보편성을 위해 보편성에 의해 행해지는 보편성의 억압, 합의된 폭력이니까요. "쟤는 하는데 넌 왜 못하는데? 그럼 쟤에게 불공평하잖아." 그럼 불복종은 개체성에 입각한 자기방어적 폭력입니다. "쟤와 난 다르니까 못 하지. 다른 것을 같게 다루는 것이 더 불공평하잖아?" 쓰신 글에 비추어보면, 님은 일반적인 병역 요구 자체에도 시민의 기본권에 대한 일시적 침탈, 즉 폭력이 기본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동의하실 것 같습니다. 이 침탈은 국방 서비스라는 필수적인 공공재를 위해서 구성원들이 감수하기로 합의했다고 간주되는 폭력입니다.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구성원들이 자신의 재산권에 대한 일시적 침탈에 감수하기로 합의했다고 간주되는 조세처럼.) 그리고 대체복무제에는 그 기본적으로 합의된 침탈 대신에, 징벌적 성격의 폭력이라는 대안 폭력(여기에 덧붙여 여분의 폭력까지)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그 지점까지는 님과 저의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리고 님은 그 대안 폭력들의 존재 자체가 부당하다거나 과다하다는 입장이겠지요. 전 그 대안 폭력들(여분의 몫까지)의 존재가 정당하다고 봅니다. 공익을 위해서. 그 적정값의 결정은 사회적 합의로 이루어지겠지요. (전 폭력보다는 비용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만. :) )
간략하게 적자면(사실 이미 고려해보신 것 같아 불필요해 보이지만.), 적정값 결정은 병역대상자들의 선택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 문제입니다. 즉, 기존 복무제를 대체하는 성격의 폭력 부과 부분은 국방 서비스에 대한 무임승차 방지 목적이고, 여분의 폭력 부과 부분은 각각 병역기피자가 대체복무보다는 기존복무를 택하게 만들만큼 크고, 병역거부자가 옥살이보다는 대체복무를 택하게 만들만큼 작아야 하지요. 전자는 병역기피라는 병력 가용 자원의 낭비를 막고, 후자는 병역거부라는 노동력 가용 자원의 낭비를 막기 위해서 입니다. 이 논변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왜 이 대안 폭력들을 없애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체에게 이익으로 작용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지금 논하는 것은 개인 윤리가 아닌 사회 전체의 보편윤리 영역이니까요. 시민 불복종 운동자들의 변혁 요구의 정당성의 근거는 결국 공익에 대한 기여 증명에서 나옵니다. (아니라면 소수 이익집단의 공익을 희생시킨 로비와 다를 바가 없어지니까.)
두 번째 문단 부분. 고문(처벌, 합의된 폭력, 비용 부과, 증명)과 양자택일적인 윤리적 요구는 양립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 거리 두기의 불가능성은 동의합니다. 근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여론의 그 사후 윤리적 정당성 심사 여부와 관계없이, 그리고 결국 정당하다고 판명되는 경우에도 상관없이, 당시 현행법상 처벌 과정은 기계적으로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겁니다. 불복종 행위자들은 대개, 처벌은 일단 감수하고, 다음 입법 과정으로 이어지는 여론 심사 및 형성 과정까지에 집중합니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객관적 거리 두기 같은 초고난도(사실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기동은 꼭 필요하진 않습니다. (가능하면 좋겠지만.지향하면 좋겠지만.) 지적하신 윤리적 양자택일은 언제나 사회 구성원 각자의 주관적 거리 속에서만 일어날 수 밖에 없지요. (각자에게 객관적 거리를 취하라고 요구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엄밀한 의미에서 정말 가능한 자는 거의 없을 겁니다.) 대부분의 보편윤리들은 대다수의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간주된 행위를 금하고 권합니다. (간음을 하지 말라거나 이웃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지, 태양계 밖 외행성으로 순간이동을 하지 말라거나 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지요.) 즉, 보편적 행위 가능성을 전제합니다. 불편부당한 객관적 거리 두기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미 배제된 전제입니다. 기능주의적 관점, 평가는 엄격한 객관적 거리 두기 없이도 가능합니다. 단 불완전하고 부분적으로만. 각자는 자신의 주관적인 거리와 경험과 선입견과 지식과 신념을 가지고 주관적인 한계 내에서만 판단할 수 밖에 없죠.그리고 그 불완전한 의견들이 모여 역시 불완전한 총의가 됩니다. 그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존중받는. 만일 개인 윤리 차원의 논의라면 자기반성이나 자기완성 등의 목적을 위해 이 한계 부분과 취약점에 대해 집중할 수도 있겠지만, 보편적인 사회 윤리 차원의 논의라면 그 객관적 거리두기의 불가능성이라는 한계 지적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rainkeeper님의 논리적 결론인지 무엇인지 잘 잡히진 않지만, 대략 병역거부자에대한 처벌은 정당하다라고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할때, 사실 rainkeeper님의 논리에 흠잡을 만한 것이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맞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으니깐요.
그런데 그건 누구에게 맞는 이야기인가요?
논리학에서 존재의 세계와 개념의 세계는 무관하다고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존재에서 개념으로 이행, 개념에서 존재로의 이행은 불가능하고 또한 그것은 오류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존재의 세계나 개념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무가치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이러한 오류가 실제로 현실에서는 범해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즉, 그럴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념은 존재에 참견하고 존재도 개념을 농락하는 것이 현실의 지평인 것 같습니다.
다시, rainkeeper님의 주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섬세하고 정교한 정당화 근거들에 대해선 정말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논리가 현실에 작동하게 될때, 그것은 어떤 현실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유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저는 좋은 말로는 논리의 수행적, 화행론적 성격을 언급하는 것이고, 나쁜 말로는 논리가 논리의 세계를 넘어서는 월권행위에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셈입니다.
그리고 다시,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이 정당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옳은 것일지라도, 누구를 위한 것이고, 누구를 위하지 않은 것인가요?
"시민 불복종 행위자의 처벌을 반대하는 주장은 오히려 시민 불복종 운동의 정당성을 기반부터 무너뜨릴 위험한 논리"이고 이는 결국 "소수 이익집단의 공익을 희생시킨 로비"와 다름 없다는 결론은 누구에게 이득이 되고 누구에게 실이 되는 주장일까요?
이 주장의 내적 논리에 설득당하여 시민 불복종 행위자들이 처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딴지도 안걸고 수긍하게 될때,
그것이 발생시킬 현실적 결과는 오히려 시민 불복종 행위자들의 취지와 의지를 무너뜨리는 논리는 아닌가요?
그리고 이제 맥락을 달리하여
옛날부터 정말 궁금한거였는데요, 대체 공익은 뭔가요?
공익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어떤 보편타당함이라는 가치는 사실 공익이라는 말의 아젠다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
모든 공익은 사실 누군가의 사익 아닌가요?
언뜻 떠오르는 대표적인 보편타당해보이는 가치들이 있긴 합니다. 자유 평등 박애 사랑이라들이 인권같은 것들이요.
근데 이런 단어들이 지니고 있는 추상성과 무관하게
실제로 자유 평등 박애 사랑 인권이라는 말이 사용될때,
그것은 너무나 구체적인 가치가 되는 것만 같습니다. 너무나 구체적인 소수의 특정집단들을 위한 가치말이지요.
그리하여 제글에 대해 정리를 하자면,
전 주장의 근거가 확보되는 논리적 정당화의 작업보다는
그 논리적 정당화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 필요하는 전제들, 즉 주장 이후(논리적 정당화)가 아니라 주장 이전(전제들)을 묻고 싶습니다.
정말 거칠고 단순하게 말한다면 누구편을 들고 시작하시는 건가요? 이지요..;;
(하지만 주장 이전 이후라는 말이나 시작이라는 말을 실제 경험적 시간으로 여겨주지는 말아주세요, 그것은 차라리 논리적 선차성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누구편이라는 말 역시 실제로 누구편을 들고 이런 논리를 짰느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그 논리가 현실속에서 논리적 귀결로서 들게 되는 편을 의미한다고 얘기할수 있겠지요;;; )
그리고 개인적 느낌으로는 rainkeeper님의 논리속에서 병역거부자들은 마치 경제학에서 상정하는 합리적인 개인이라는 전제처럼, 즉 학문의 성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정작 그런 전제를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그런 합리적 개인처럼(즉 인간이 아니라 학문이 고려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치 군대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계급이 있고 사람은 숫자로 환원되는 것처럼(그래거 군대에서 개인은 인간이라기보단 어떤 도구겠지요;;), 그렇게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다시 존재와 개념이 문제시 되는 거기도 하겠네요 0ㅅ0;;
그리하여 rainkeeper님의 논리가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회의 공익이라기보다는 지금 현재 존재하는 사회의 유지인것 처럼 보입니다.
사회의 유지도 정말 중요하지만, 왠지 이런 식의 사회유지 속에서는 너무 갑갑할 것 같습니다.
제가 rainkeeper님을 잘못이해한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은 듭니다.
부디 저의 오해를 풀어주시기를, 즉 rainkeeper님의 논리 안에서 병역거부가 정당성을 확보할수있는 기준의 제시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rainkeeper님의 바로 윗글의 3번째문단에서 특히 눈에 뜨입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그 기준을 만족할테까지는 병역거부는 거부될 것으로 보여집니다.-병역거부 거부의 논리), 실제로 그 논리를 통하여 병역거부자들이 병역거부를 할수 있는 그런 논리(-병역거부 찬성의 논리)의 제시 말이지요.
툭끼어들어서 죄송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입이 방정인지라;;;;;;, 여기선 손이 방정이란 말이 더 맞겠네요;;
우선 저는 윤리가 이익에 대한 판단에 기초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사회 전체의 이익에 대한 고민에 윤리적이란 표현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저는 칸트의 윤리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양자택일적 요구 앞에서 기능주의적 관점은 존재할 수 없음을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통치가 원활히 이루어지는 사회라면 현행법상 처벌은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그 처벌이나 현행법 또는 그 사회는, 옳은 것이거나 나쁜 것 어느 하나로 결정될 것입니다. 물론 그와 같은 판단이 행동에서 지지나 반대로 그대로 나타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윤리적 판단과 제도적 문제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적으신 것처럼 불완전한 의견들이 나오겠지요(이 지점에서 기능주의적 관점이 뒤늦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rainkeeper님은 이 불일치에 대한 고민을 개인 윤리 차원으로 놓고, 그 반대편에 사회 윤리 차원을 설정하고 계십니다만, 저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윤리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의 구분은, 제 생각에 '심정 윤리'와 '책임 윤리'를 구분하면서, '책임 윤리'에 손을 들어 줬던 베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베버의 이런 정식화가 윤리를 고민하는 데 그다지 유효한 문제틀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허구적 구분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이런 식의 구분 속에서는 언제나 책임 윤리만이 더 우월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지만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순전히 역량의 부족 때문에), 이렇게 고민의 방향 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