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 생활용어 사전 대학 일반

 

 

ㄱ~ㅎ

 



 

공부와 생활 간의 간극- 시인 김수영은 생활인이지 못한 자신에 대해 늘 괴로워했지만, 그 괴로움은 시인 아닌 대학원생들도 아주 잘 알고 있다. 대개의 경우 소액의 장학금에 만족해야 하는 인문 계열부터 월급이랍시고 쥐꼬리만큼 받기는 하는 분야까지 이 심정은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공부를 업으로 삼기 위해 대학원에 왔으며 실제로 신진 연구자로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는 사회적으로 노동으로, 생업으로, 생활을 위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결국 공부는 공부대로 하고, 생활을 위한 일은 따로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결혼이나 연애를 해 지출이 늘어날수록 생활을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 공부란 그야 말로 생활의 문제가 해결되고 난 뒤에야 돌아볼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러매 생각해 볼 진대, 공부란 논문으로 쓰는 시인가 보다.

 

국내박사- 돈이 없어 국내에서 박사를 취득 한 사람. 많은 국내박사들은 자기는 뜻이 있어 가지 않은 거라며 항변할 게 틀림없으나 재정에 대한 고민이 없음에도 유학을 가지 않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전공에 따라 국내박사의 위치는 다르나 국문과나 국사학과를 제외하면 대부분 학계에서 취급을 받지 못한다. 국내박사의 학문적 역량에 대한 선입견은 전공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이 선입견은 한국은 학문 후진국이므로 학문 선진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낫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전공에 따라 다른 근거들을 덧붙이며 세분화 된다. 예를 들어 다른 언어나 그 문학을 전공하는 과의 경우 해당 언어 사용국으로의 유학은 필수적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이런 전공일 경우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는 것은 평생 시간강사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문학을 학문으로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언어에만 능통하면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얻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 기반한 것은 절대 아니다. 기타 인문, 사회과학의 경우. 인문학의 전통이 오래되었으며, 역사적인 학자를 많이 배출했고, 여전히 뛰어난 학자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좋다고 여겨진다. 문학만큼은 아니나 원어로 원전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도 꽤 있다. 따라서 역시 해당국가로의 유학이 기본적인 코스로 여겨진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 학문 영역에서 깊이 있는 사고를 하는데 특정 언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빠져 있다.

국내박사들의 생존 전략은 국내에 있다는 이점을 살려 여러 외부 강의에 참석하거나 국내의 학문 시장 또는 독서 시장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국내에서 일종의 소장 학자 그룹을 이루게 된다. 때로는 한국에서 학문을 하며 한국 사회에서 기여해야 하기에 자기는 유학을 가지 않은 것이라며 자신들에게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유학파들과 국내 박사들 사이엔 미묘하거나 노골적인 갈등이 있다. 대체로 유학파들은 돈이 많은 경우가 많으므로 은연중에 흐르는 계급 간 적대감부터 자기들은 학문 종주국에서 더 뛰어난 걸 배우고 왔다는 우월감 등등. 예컨대 프랑스 현대 철학이 한국에서 유행한 것을 국내 박사들이 철학적으로 깊이도 없으며, 프랑스에서는 철학으로 취급되지도 않는 것들을 그것들이 자극적이라 장사가 되니 먹고 살기 위해, 그리고 프랑스에서 본격 철학을 공부한 유학파들에 대항하기 위해 퍼뜨린 것이라 해석하는 유학파도 있다.

 

교수-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꿈꿀 수 있는 최고의 경제적 보상. 그러나 임용 절차와 자격 요건에 대한 제도화는 전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대학원을 다니는 목적. 특히 부모들의 경우 그렇게 보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실한 자신이 있어 열심히 하다 보면 분명히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갖는 사람, 명문 학부를 나와 명문 대학원에 들어 왔으므로 어떻게든 풀릴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 실력에도 학벌에도 큰 기대는 없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풀릴 것이라는 비상식적인 희망을 품은 사람, 자기 전공의 학문 사회 내의 입지가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그래도 나는 잘 되지 않을까 기대를 갖는 사람, 실력, 학벌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줄 잘 서고, 뇌물 바치는 것 밖에 답은 없지 않은가 하고 연초에 연하장에 쓸 멘트를 고민하는 사람, 실력, 학벌도 없고, 학계도 쇠퇴하고 있으므로 꿈도 희망도 없다고 포기한 사람, 공부는 공부일 뿐 교수가 되든 말든 크게 상관 안 하고 구도의 길을 걷겠다는 사람, 돈이 많아 교수 걱정 할 필요가 없는 사람 등등 다양하다. 분명한 것은 박사 취득 후 취업률, 박사 학위 소지자와 포스트의 비율, 박사 학위 소지자 증가수, 국내 박사와 유학 박사의 비율, 학벌에 따른 임용률 차이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검토하여 이런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자료도 없거니와 있더라도 널리 공개되어 있지 않다.

교수가 되고 싶어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연구를 하면서 밥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 돈 욕심 없는 학부생들은 교수야말로 꿈의 직업 아니냐고 하는 경우도 꽤 있다. 좋아 보이겠지... 그러나 이런 기초적인 이점 외에 추가적인 이점은 무궁무진하다. 일단 정년 보장이다. 사회면에 실릴 만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짤리지 않는다. 연구하고 가르치라고 월급 주는 거지만 안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게다가 학교 밖에 나가 교수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껌뻑 죽는다. 학교 안에서도 학생들은 모두 교수를 왕처럼 떠받든다. 이들이 교수의 타락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이들은 대학원생의 타락한 모습이기도 하다. 대학원 생활에 지쳐 삐뚤어지면 이런 걸 진심으로 탐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교수의 선의- 우리 하느님은 벽옥 같은 사랑의 하느님인 동시에 홍보석 같은 진노의 하느님도 되시니...

 

 



 

대학의 기능(한국사회에서의)- 1. 사학 배불려 주는 기능 2. 사람을 모으고, 그들에게 돈을 걷어, 그 돈으로 국가나 대학이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어 공급하는 기능 3. 계층 간 유동성을 살짝 열어 두는 걸 대가로 계층 간 격차를 합리화하는 기능 4. 패거리를 이뤄 지배 구조를 재생산하는 기능 5. 과외 강사, 학원 강사 배불려 주는 기능.

그 외 기타 비채택 의견으로 공부하는 사람에게 안정적인 생계를 제공해 주는 기능, 학문을 연구, 발전시키는 기능, 학문을 연구, 교육하여 인류 발전에 이바지 하는 기능, 인간을 더 나은 존재, 완성된 존재로 형성시키는 기능 등이 있다.

 

대학원(학습공간으로서의)- 공부를 하기 위해 다른 걸 포기하고 대학원에 왔으나 대학원에 오면 다른 걸 위해 공부를 포기하게 되는 딜레마가 있다. 몇 가지 이점도 있다. 도서관이라는 기초 인프라를 이용가능하다는 것, 학교나 전공에 따라 연구실을 주기도 한다는 것, 같은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사귈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가성비는 최악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대학원생(직업으로서의)- 예전에는 대학원이란 정말로 돈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거나 교수에게 장래를 촉망 받아 지원과 취직 자리를 보장 받고 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학이 대중화된 만큼이나 대학원도 대중화되어 대학원에 가는 사람이 그리 드물지는 않은 지금, 대학원생은 더 이상 특별한 신분이 아니라 직업 적령기에 내릴 수 있는 하나의 선택이 되었다. 따라서 대학원은 직업은 아니지만 직업의 유사품으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대학원의 직업적 성격은 박사 후 취업할 때에 소급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니 대학원 기간 동안에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분명 이후에 교수가 되거나 강사가 되려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좋아서 하는 거 아니냐’라는 말로 직업적 성격은 무시당한다. ‘너희가 좋아서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은 ‘그거 네 취미 아니냐’를 순화시킨 표현이다.

 

대학원생의 권리- 대학원이란 전근대 사회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개념

 

대학원생 권리 선언- 먼 훗날 누군가는 그들을 열사로 기억할 것이다.


 

동료 - 같은 분야에서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비슷한 경제적 능력을 지녔다는 전제조건을 요구한다. 따라서 강사와 강사, 교수와 교수 사이에는 동료관계가 성립되지만 강사와 교수 사이에는 성립되지 않는다.

 



 

미국 - 사제들이 율법을 참고하기 위해 뒤적거리는 경전. 기독교의 '성경'은 이것을 본따 만들어졌다. 이 책에는 모든 진리가 실려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업데이트 되기도 해서 때때로 젊은 사제들이 새롭게 발견된 내용을 통해 옛 진리를 비판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그 젊은 사제들 또한 수십년 뒤 옛 진리의 옹호자로 몰려 숙청당하곤 한다. 사제들은 이단을 가려낼 때 "미국에서는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밥벌레- 이따금 태어난 게 미안해질 때가 있다.

 

방조교- 교수의 연구실에 책상을 놓고 교수의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는 불우한 인생. 매우 불우한 존재이므로 긍휼히 여겨 주자. 교수의 시선이 등에 꽂혀 어디 책이나 편하게 읽겠으며 어디 잠이나 편하게 자겠으며, 커피나 편하게 마시겠는가. 그렇게 하루 종일 긴장 타며 교수의 잔심부름을 기다려야 한다. 교수의 잔심부름의 영역은 끝도 없다. 대개의 경우 교수들은 하나의 인격체이자 연구자로서 대학원생들에게 시켜야 될 것과 시켜선 안 될 것을 구분하는 판단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비판적/대안적 담론- 사회에서도 학계에서도 유리된 교수/연구자들의 마지막 자존심. 학문 세계는 타락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학자는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담론을 제시해 사회 여론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 대개의 경우 소통에 대한 절실한 고민은 없는 자뻑이다.

 

 



 

스페셜리스트- 한 분야의 책만 죽어라 읽어 무식한 대학원생이 자신의 가치를 변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 제네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라는 말은 가치중립적일 수 있으나 대학원생이 이 말을 사용할 때는 제네럴리스트는 폄어라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문사회계의 경우 스페셜리스트가 과연 좋은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품는 경우도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전공 지식이 부족한 사람일 수 있으니, 전공 영역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은 안 하는 게 법도에 맞는다.

 

 



 

연구실의 삭막함- 연구실에서의 인간관계란 직장에서의 인관관계와 같다.

 

유학- 학생의 꿈, 지성과 교양의 상징, 선진 문물을 접하며 세련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이거나 친구도 없고 물가도 비싸니 공부에만 전념하여 성실한 연구자가 된 양 자기 만족할 수 있는 기회. 학계에서 인정받기 위한 커리어 패스. 주로 서유럽이나 미국으로 간다.

그러나 일부 분야의 경우 해당 학문을 한다는 것과 유학을 가는 것 사이의 필연적인 상관관계는 그리 깊이 성찰되고 반성되지 않았다. 그런 분야의 경우 유학은 유학을 가면 취직 활동에 유리하다는 것과 아무래도 학문 종주국들이니 더 뛰어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어쨌든 외국어 하나는 익히리라는 기대 아래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서 보면 현실은 시궁창. 이름난 교수는 외부 활동 하느라 나 따위는 지도해 줄 여력도 없고, 학문종주국이라 학문 인프라가 빼어날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고 등등.

 

유행 - 학계에 주기적으로 출몰하는 태풍. 사람들은 그렇게나 강한 태풍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나간 자리가 전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훨씬 질서정연해졌음에 경이를 느낀다.

 

인문사회계와 공대의 갈등- 공대는 프로젝트라고 하는 것이 있어 그 일원으로 전문성을 인정받으며 참여하여 돈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인문사회계가 보기에 공대에서의 공부란 연습/사고의 훈련이 아니라 시간을 투자하고 그 결과물을 공적으로 인정받는 과정으로 보이고, 반면 인문사회계의 경우 대학원 과정이란 더 높은 수준의 학부 수업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아 찌질해 보인다. 이런 찌질함은 인문학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공격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리에이션은 인문학이 지금 대체 무슨 필요가 있냐, 인문학이 대학의 전공 학문으로 있을 필요가 있냐 부터 인문사회계도 이공계의 업적 평가 모델에 따라 논문 제출 수나 피인용수를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이에 대해 주로 행해지는 인문사회계의 응답은 “인문사회학은 창조적 사고 및 비판적 사고를 길러 주며..."라는 공통지반에서 출발하여 ”더 나은 삶에 대한 고민을 위해 남겨 둬야 할 영역“이라는 둥 “요즘 같은 지식 기반 사회에선 CEO 도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 등등으로 흘러 들어간다. 간혹 삐뚤어진 전공자들은 인문학의 철저한 무용성을 그대로 긍정한 후 그걸 자신들의 정신적 귀족성의 은밀한 표징으로 삼기도 한다.

 

인문학의 사회적 가치- 석사 이상까지 공부를 할 경우 분비되는 뇌내물질. 배운 사람한텐 보여요☆

 

 



 

자살-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공부를 마쳐도 보장되는 게 없을 거라는 스트레스+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길도 없다는 스트레스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는 대학원생이 버티다 못하면 내리는 선택. 사회를 향한 최후의 호소이지만 이슈는 되지 않는다.

 

제 3의 길- 공부는 계속하되 대학에 남아 있지 않고 외부의 길을 개척하려는 시도를 이르는 말. 회사원 철학자 강유원부터 수유 너머까지 유형은 다양하다. 그러나 대개 못 살며, 이들에 대한 학계의 시선은 대체로 차갑기 그지없다. 유학을 다녀오지 않아 언어 실력이 없다는 둥 학술적이지 못한 말랑말랑한 글만 써낸다는 둥 비난의 유형은 가지가지이다. 그러나 대체로 둘 간의 진지한 학술적인 교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한국에 진지한 학술적 교류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일부러 왕따시키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절친한 동료 - '동료' 항목에서 언급된 사람들 중 비슷한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경우. 과거 절친한 동료는 알콜중독을 경유했으나 현재는 골프 및 테니스와 같은 합리적인 경로를 통하게 되었다.

정년보장tenure - 학계의 '진실'을 들춰내기 전 그 폭발에 대비하여 몸에 둘러야 할 방패. 방패를 얻지 못한 애송이 학자들이 성급히 학계의 진실과 대면했다가는 저 멀리 캔자스까지 튕겨 나갈 위험이 있다. 태풍에 쓸려가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잠시 눈 앞의 사막에 황망해하다가 방패를 땅에 떨어트리는데, 놀랍게도 그곳에서부터 오아시스와 녹색 벌판이 나타나는 기적이 벌어진다. 정년보장을 받은 학자들은 남은 평생동안 그 벌판 위에서 지팡이를 들고 공을 때려 구멍에 집어넣는 의식을 수행하며 도를 닦는다. 학자의 이상적인 상태. 비슷한 말로 열반, 해탈이 있다.

 

조교 - 학문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티안나는일을 도맡아하는 고학력도우미. 교수의 개인비서, 운전기사, 일일교수대체강사, 학회/학과 공용머슴 등 다양한 변형태가 있다. 정당한 노동의 댓가 따위, 개나 주라지. 노동삼권따위, 소가 웃겠군. 안그래도 황량한 그놈의 학계에 썰렁한 먼지바람 일으키며 최저생계보장, 노동삼권보장 외쳤다가는, 쥐도새도 모르게 존재의 흔적까지 사라져버릴 수 있음에 주의할 것. 따라서 소위 조교에 따라붙에 마련인 약간의 떡고물에 환장하기 전에, 쉰떡인지 안쉰떡인지 주도면밀히 사전탐색해야 하나, 일반적으로 조교제의를 받는 대학원생이라는 신분의 인간들은, 제코가 석자인 경우가 많아 이 전근대적 유물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음. 봉투붙이기, 명찰만들기, 각종 문서 작업 및 편집, 전화연락, 식사예약, 운전, 청소, 장보기, 요리, 웃기기, 이야기(주로 자랑) 들어주기, 술마셔주기, 탬버린치기, 장단맞추기, 때로 통번역까지... 손발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에서부터, 못하는 일마저도 배워서 처리하는, 당신은 진정한 올라운드 플레이어... (P.S 조교가 있다보니 손발이 있는 사람도 없는 척 하는 경우가 천지빼까리임.)

 

지도교수의 직무유기- 그냥 강의하는 교수가 아니라 지도 교수란 제도가 있는 이상, 지도 교수가 해야 할 일은 연구생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막연한 연구 주제를 끄집어 내 명료화시켜 주는 일일 게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수가 하는 일은 경우 원생들이 속으로만 끙끙 앓다 짜 낸 주제를 퇴짜 놓는 일이다. 그나마 이런 대화는 일 년에 몇 차례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정 면담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교수가 지나친 열의를 보일 때도 있다. 연구 주제에 끊임없이 간섭하거나 굉장히 밀접한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부모 대리 찾으러 대학원 온 게 아니라면 이런 관계도 바람직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


 

 



 

토론문화- 교수와는 사담을 나눌 때도 의견을 제시하기 힘들다. 그런데 전공 영역에 대한 토론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패배주의- 대학원생의 기본적인 사고방식. 교수란, 학계란 원래 그런 것이려니 한다. 대학원에는 복종 아니면 저항의 두 가지 관계가 있으므로 그러려니 한다는 건 복종을 의미한다.

 

프랑스 - '미국'의 추종자들에 대항하는 이들이 참고하는 경전의 이름. 자세히 살펴보면 '미국'의 표지에 교묘하게 손질을 가해 제목만 바꾼 책에 불과하다는 의혹이 있다. 그러나 책표지가 매우 예쁘게 꾸며졌기 때문에 미적인 감수성을 갖추었거나 그런 평판을 얻고 싶은 사람들에게 좀 더 인기가 좋다.

 



 

학계 - 들어오는 과정이 너무나 험난하기 때문에 모두가 그 존재를 믿고 있는 허구fiction. 만신창이가 되어 학계에 겨우 진입한 사람의 눈 앞에는 오즈의 마법사가 나타난다. 학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은구두로 바닥을 세번 두드리는 대신 양손으로 두 귀를 덮는 것으로 충분하다. 실제로 학계라는 이름의 넓은 사막에서는 두 귀를 막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 즐겁게 살아가는 수행자들이 곳곳에 발견된다.

학계에 대한 신뢰- 학문의 규칙은 일차적으로는 학계의 규칙이다. 대개 성문화되어 있지 않은 불문율로, 그 기원은 베일에 싸여 있다. 그 미스테리함의 정도는 전공마다 다를 것이나 인문사회계의 경우 특히 심하다. 왜 이 논문이 학회지에 실렸는지(제출한 사람이 적으니까!), 왜 내 논문은 떨어졌는지 등등에 대해 판단하기란 무척 어렵다. 게다가 선행 학문 세대들의 경우 학계의 규칙은 커녕 학계 자체가 없던 시절에 공부한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말을 얼마나 신뢰해야 좋을지도 알 수 없다. 젊은 교수들이 학계의 주축을 이루게 될 시점부터는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도 해 보지만 그건 6,70 대가 죽으면 한나라당의 지배도 끝날 거라는 그런 기대처럼 허무맹랑한 건 아닐까 싶은 불안감도 있다.

 

학문공동체-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것

 

학문의 사회적 가치- 논하기 위해선 저서가 필요하다. 그 저서의 결론이 가치의 확증이 될지, 부정이 될지, 변명이 될지는 써 봐야 안다.

 

학문적 정체기- 인문사회계의 경우 8,90년대에 본격적으로 수입된 현대 프랑스에서 유래한 이론들이 지난 20년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많은 신진학자들이 그 수입상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정치적으로든 학문적으로든 그런 대전환이 부재하는 시대이면서 여전히 그 시대의 자장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별 수 있는가. 유행도 슬슬 끝물이다. 세련된 이론이 사회와 뭔가 유의미한 소통을 하리라는 기대는 빗나간 것이었다. 그러니 그런데 힘 빼지 말고 전공 열심히 파서 스페셜리스트 돼야지♡

 

학문 내 소통- 같은 전공이라도 영역이 다르면 서로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 또한 사례 연구보다 이론 연구가 높이 평가 받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원로 교수들의 뭔가 그럴 듯한 이론에 기반해 사례 연구를 해 보지만, 그들로부터의 피드백 따윈 없다.

 

학문 후속세대- 민주화와 더불어 자라난 진보적 학풍을 이어 받을 세대. 현재 사회의 문제가 청년 세대에 있다면 현재 학계의 침체는 선배들만 못한 후배들에게 있다. 그러나 정작 후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자기들이 뭘 잘못했길래 후속세대가 없나도 고민하지 않는다.

 

학비- 학부 학비보다 2-30% 가량 더 비싸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교수 1인 당 1명에게 학비 면제+약간의 월급을 주게끔 조교로 고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없는 대학이 더 많다. 많은 경우 부모들은 교수자식 두는 데 대한 환상이 있으므로 간곡하게 설득하면 기꺼이 학비를 대 준다. 부모에게 손을 벌리든 아니든 간에 대부분의 학생들의 마음속에도 언젠가 교수가 되어 보상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는 기본적으로 조금씩은 있다.

 



학회- 동창회 또는 경로당. 흥미로운 논문은 발표되지 않고, 흥미로운 지적질도 이뤄지지 않는다. 대충 구색 맞추기로 쓴 논문 들고 나와 슬렁슬렁 읽고 들어가는 게 전부. 그렇지만 원로들 눈 밖에 나는 일을 해선 절대 안 된다. 원로들이 싫어할 주제도 안 되고, 원로들 지적질에 반박해도 안 되고, 원로들 논문(만약 그들이 발표를 할 경우)에 지적질을 해도 안 된다. 몇 번 학회를 다니다 보면 공부란 결국 독고다이로 하는 수밖에 없단 걸 깨닫게 된다.



 

 

A~Z

 

 

R

 

RA/TA 노조- “어떻게 분위기 삭막해지게 교수 학생 사이에 이런 걸 만드니?”



 

이 블로그에 대하여

이 블로그는 서울대 법인화 및 대학과 관련한 여러 가지 이슈를 모으고 정리하기 위해 개설되었습니다.

블로그에 수록된 자료는 모두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으니 따로 허가를 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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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미 슌야, <<대학이란 무엇인가>> 발췌역 대학 일반

2011년 7월에 출간된 요시미 슌야의 따끈따끈한 이와나미 신서, <<대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서론과 후기에서 발췌해 올립니다. 원래 다른 일에 쓰려고 옮겨 두었으나 일이 난항을 겪고 있어 아쉬우나마 이거라도.

주요 주제: 기존 대학론-교양교육론-의 문제점 지적, 현재 대학 상황 검토, 대학의 역사 검토, 대학의 신생을 위한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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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이란 무엇인가?

지금, 대학은 전에 없이 곤란한 시대를 맞이했다. 1990년대 이후, 대학설치기준의 대강화와 그 결과 발생한 교양교육의 붕괴, 대학원 중점화, 국립대학 법인화, 소자화(少子化)에 따른 전원 입학화 경향과 학생의 학력저하, 젊은 연구자의 포스트 불안정화, 글로벌화와 유학생의 급증 등등, 커다란 파도가 몇 차례나 들이쳐 대학 제도의 짜임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시대가 되었다. 대학운영의 틀도 대학교사의 생활도 이미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 가고 있다.

[...]

그러나 대학에 대한 이런 많은 논의들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대학이란무엇인가’라는 물음, 즉 대학개념 자체에 관계된 물음을 대학이 직면한 곤란과 맞부딪히는 작업이다. 지금의 많은 대학 담론은 대학이란 제도를 이미 주어진 전제로 삼은 채 현대의 급격한 변화상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대학’ 개념 그 자체의 재정의, 또는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물음에 대해 새로운 방법으로 답하려는 시도인 게 아닐까?

사실 지금까지 이런 물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 몇 명의 논자들에 의해 대학에 있어서 ‘교양’의 재구축이 주장된 바 있다. 대강화에 의해 교양교육이 위기에 처하고, 대학원 중점화에 의해 학부교육자체도 경시되기 쉽게 되고, 전문직 대학원등의 설립으로 점점 이 경향이 강화되는 와중에 교양의 장으로서의 대학이라는 근간적인 개념이 유명무실해 졌다는 비판이다. 이 비판은 아마도 타당하다. 그러나 비판 이후 밟아야 할 길이 반드시 ‘교양’의 재구축인 것만은 아니다. ‘교양’의 재구축 이상으로 ‘대학’의 재정의, 대학을 그것이 과거의 두 세기 간 존재했던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즉 구래의 ‘교양’의 재구축으로 회귀하지 않는 포스트 국민국가 시대의 가능성의 공간으로 재 정의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런 재 정의는 대학에 가해지고 있는 오늘날의 엄격한 시선에 대한 응답이라는 의미에서도 불가결한 것으로 생각된다.

[...]

부모 입장에서 보면 얼마 안 되는 생활비를 변통해 학원비를 대고 대학에 겨우 합격하면 비싼 학비를 부어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이의 학력이다. 학력만 얻을 수 있으면 교육의 내용에 관해서는 따지지 않는다. 대학 측에서도 충분한 학비 수입을 확보할 수 있으면 교육의 질 향상은 제쳐 둔 채 그것을 사업 확대에 쓰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해서 고등교육이 미래 사회에서 어떤 공공적 가치를 담당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공공재정 지출을 계속해 억제하는 정부와 아이의 입시에 정신이 팔려 있는 가정 사이에서 방치되었다.

폭발하는 대학

현재 대학의 위기란 어떤 위기인가? 교양의 붕괴와 학생의 학력저하, 대학교육의 가능성이나 학위에 대한 세상의 놀랄 정도의 이해 부족, 교직원의 정원 삭감과 시자유주의적 가치의 침투와 같은 현실에 매일 접하고 있으면 지금 이 나라에선 대학이라는 제도는 절멸상태에 처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러나 대학이 절리고도의 순수 종으로, 외래의 여러 위협에 노출되어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학을 너무나도 낭만화하는 것이다. 대학은 적어도 현상에 있어서는 멸종생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지난 2,30년 동안의 세계적 흐름을 생각해 보면 대학이라는 제도는 오히려 대폭발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종이 돌연 대증식을 시작해 지상을 뒤덮어, 이윽고 스스로의 과잉과 그것이 가져 온 생태계의 파괴로 인해 멸종을 향해 가는 그 직전의 상태와 같다.

왜냐하면 세계의 대학이나 학생 수는 20세기 초두까지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해 이 30년 사이엔 더더욱 폭발적으로 증가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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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에서 대학이라는 제도의 지배력은 줄어들기는커녕 압도적인 것이 되었으며 글로벌한 지식생산 체제이 지배적 부분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대학의 멸종을 걱정하기 전에 우선 글로벌한 지식체제로서 폭발하고 있는 대학이 그 실질에 있어 어떻게 변질했으며 심각한 곤란에 직면해 있는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학은 두 번 태어났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 아래 이 책은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그 역사로부터 대답하려는 시도이다. 전체 상을 분명히 하기 위해 여기서 다음 장 이하에서 다루어질 내용의 골격을 해설하도록 하겠다. 이 책의 서술은 다음 세 가지 탐구를 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첫 번째로 대학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그 재생과 이식, 증식이라는 세계사적 파악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대학의 개념이 유명무실해 진 것은 현대가 처음이 아니다. 대학은 지금까지 적어도 두 번의 탄생과 한 번의 죽음을 거쳐 왔다. 대학이 탄생한 것은 12세기에서 13세기의 중세 유럽이다. 중세적 질서 속에서 대학은 교황권력과 황제권력이 대립을 교묘히 이용하며 또 그러한 보편적 권력과 도시를 지배하는 지방 유력자와의 밸런스를 이용하며 유럽 전 지역으로 증식해 갔다. 그러나 이 중세 이래의 대학은 근대 이후의 대학에 그대로 연결되지 않는다. 15세기까지 이어진 고양기가 지난 뒤 16세기에 시작되는 근대를 향한 역사 속에서 대학은 활력을 잃고 지식생산의 중심저인 공간이 아니게 된다. 이 시기 인쇄술이 대학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근대의 지를 낳고 발전시킨 기반은 활판인쇄술이며 그 커뮤니케이션을 기초로 한 편으로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서양문명 전체를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 빠뜨리고 다른 한 편으론 영방국가, 이윽고 절대왕정이 발흥한다. 그런 시대에 군사, 법학, 의학, 과학, 공학 등의 근대적 제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형성의 중핵이 된 것은 전문학교나 아카데미의 전문교육이지 대학이 아니었다. 즉 이 시대에 대학은 한 번 죽은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대학은 국민국가의, 그리고 제국의 지적 자원의 주요 공급원이란 지위를 부여 받아 인재육성과 연구개발의 양면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종합적인 고등교육 연구기관으로 화려하게 재탄생하게 된다. 그 효시가 훔볼트 이념에 기반을 둔 프로이센의 베를린대학이었다는 건 너무나 유명하지만 베를린대학 탄생은 훔볼트라는 한 명의 천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칸트, 쉴러, 피히테, 쉘링 등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두에 걸친 질풍노도 시대의 독일 계몽주의자들의 지적조류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 근대 대학재생의 원점에 있는 칸트는 대학을 성립시키는 주요 학부 중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 세 개를 ‘상급학부’, 철학부를 ‘하급학부’라 이름 짓고 하급학부가 이성과 진리에만 복종하고, “스스로의 교설에 관하여 정부의 명령으로부터 독립해 있으며 명령을 내릴 자유는 갖고 있지 않으나 모든 명령을 판정할 자유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칸트에 따르면 신학이나 법학, 의학 등은 대학이 국가에 의해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며 철학은 이성을 위해, 즉 진리 그 자체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대학이 대학으로서 있기 위해서는 양자 사이에 긴장감 있는 대항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며, 어느 한 쪽만 있어서는 안 된다.

칸트가 이와 같이 논한 것은 근대의 대학재생이 국민국가와의 긴밀한 관계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세 대학이 지역 유력자와 교황이나 황제의 권력 사이의 미묘한 밸런스를 교묘하게 이용해 자치도시에 발판을 마련했던 것과 달리 근대 대학의 성장에는 처음부터 국가에 의한 강력한 지원이 불가결했다. 근대 대학은 발흥하는 국민국가로부터 전면적인 지원을 받아 성장하며 그러면서도 국가로부터의 자율, 즉 ‘학문의 자유’를 주장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애당초 해결 불가능한 모순이 내포되어 있었으나 많은 대학인은 이 모순을 오히려 이용하며 대학의 발전에 힘썼다. 훔볼트도 또한 그 중 한 명이었으며 19세기를 통해 독일에서 영구, 북구 제 국, 북미대륙 순으로 새로운 대학문화의 영향력은 퍼져 갔다.

근대일본의 대학은 이런 구미 각지에 퍼진 대학개념을 이식하는 것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마치 품목 별로 최첨단 유행의 브랜드를 사 들이는 안목 없는 소비자처럼 의학과 이학은 독일, 법학은 프랑스, 공학은 스코틀랜드, 농학은 미국, 문학은 잉글랜드라는 식으로 당시에는 최첨단이라고 생각된 나라로부터 외국인 교사를 초빙하고 또 그곳에 유학생을 보내 근대일본의 학문의 기초를 쌓았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이식’이었던 것이나 이 이식된 지가 모리 아리노리의 구상에 따라 천황의 시선 아래 하나로 묶여 ‘제국대학’이라고 하는 중세의 대학과도 훔볼트형 대학과도 다른 근대일본적인 유형을 낳아 간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늘날에는 세계표준이 되고 있는 미국의 대학시스템, 즉 리버럴 아츠 컬리지로서의 학부와 석사학위, 박사학위 취득 시스템으로서 구조화된 대학원을 연결하는 현대적 대학개념도 19세기 이래의 근대적 대학개념을 재조립한 바리에이션으로 출발한 것이었다. 이 미국형 대학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대학원’의 발명이었다. ‘연구’와 ‘교육’의 일치를 원리로 하는 훔볼트형 대학에 있어선 대학원 같은 건 부속품 이상의 것일 수 없다. 그러나 실질은 교양교육 컬리지였던 미국의 대학이 진정한 유니버시티가 되기 위해서는 새롭게 그래듀에이트 스쿨(대학원)을 발명하고 유럽적 대학개념을 넘어서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발명이 20세기를 걸쳐 세계에 파급되어 지금은 전 세계에서 대학의 표준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염두에 두고 보면 지금 유럽 제 국에서 작동하기 시작하고 있는 볼로냐 프로세스, 즉 고등교육의 범 유럽적 제휴의 움직임이나 동아시아에서 구상되고 있는 다양한 대학간 제휴는 세계의 대학이 근대적 대학개념에 의해 일원화된 뒤 다음 시대의 트랜스내셔널한 대학개념의 창출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징후로 볼 수 있다. 그것이 어디에 도달할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적어도 영어가 점점 인류의 ‘새로운 라틴어’가 되고 대학인이 더더욱 더 세계 각지를 여행하게 될 것이란 점은 확실하다. 이 전개는 국민국가의 대학이라기 보다도 중세의 도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대학 시대의 재래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21세기 초두에 들어 국민국가는 쇠퇴과정에 있으며 이대로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미래 인류사회의 역사 속에서 그 역할은 점점 더 상대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 역사의 대전환기에 ‘대학’을 어떻게 재 정의할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 인류의 지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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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만약 이 책을 통해 대학에 어떤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대학이란 미디어다. 대학은 도서관이나 박물관, 극장, 광장 그리고 도시가 미디어인 것과 마찬가지로 미디어이다. 미디어로서의 대학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지식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매개한다. 그 매개의 기본원리는 ‘자유’에 있으며 따라서 근대 이후 마찬가지로 ‘자유’를 지향하는 미디어인 출판과 좋든 싫든 대학은 복잡ㅂ한 대항적 제휴로 묶여 왔다. 중세에는 도시가 미디어로서의 대학의 기반이었으며 근세가 되자 출판이 대학의 바깥에서 활발해지고 국민국가의 시대에 양자는 통합되었다. 그리고 지금 출판의 은하계에서 네트의 은하계로의 이행이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미디어로서의 대학의 위상도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본서는 ‘대학’이라는 영역에 대한 미디어론적인 개입의 시도이다. 대학을 이미 주어진 교육제도로 간주하기 전에 지를 매개하는 집합적 실천이 구조화된 공간으로서 이해하는 것. 그렇게 대학을 재정의 함으로써 대학을 둘러싼 지금의 곤궁을 타개하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를 통해 ‘대학’이라는 물음의 폭은 크게 넓어질 수 있다.






일본, '대학원생 문제라는 국가적 사기' 해외 대학

토의: 대학의 미래를 위하여(현대사상 2009/11 특집 '대학의 미래' )에서 발췌역


주요 주제: 대학원생의 과잉 배출의 제도적 원인, 일본 대학생 장학금 제도의 문제점, 데리다의 '조건 없는 대학'의 논의를 배경으로 한 짧은 대학론


원생문제라는 국가적 사기
 

니시야마 유우지(프랑스 사상): 수업료와 관련해서 이야기하자면, 장학금제도의 문제가 있지요. 고바야시 마사유키씨의 "진학격차","대학진학의 기회"라는 책이 출간됐는데요, 수업료의 많고 적음과 장학금의 충실도는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경우엔 2004년에 일본육영회에서 일본학생지원기구로 바뀌었는데요, 원래는 무이자와 유이자의 비율이 3대 1이었던 것이 현재는 1대 2로 바뀌었습니다. 애초에 이본에는 급부가 없고 대부만 있는 상황입니다.

학부생은 40%의 학생이 장학금은 받고 있고, 석사, 박사로 갈 수록 장학금 지급률이 높아집니다. 최근 문제가 된 예로는 블랙리스트화가 있지요. 장학금 환원 체납자에 대해 유예 년도를 정하고, 이를 어길 시 금융기관에 통지를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건 즉시 없애지 않으면 안 되는 제도입니다. 민주당은 무상의 급부형 장학금을 생각하고 있다고 하죠?

오오우치 히로카즈(교육사회학): 저는 이자가 붙은 장학금이라는 건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을 경제적, 사회적으로 지원한다고 하는 본래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장학금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일본의 대중교육은 사립대학을 중심으로 대중화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 이유는 고등교육 예산이 여러 선진국들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작다라고 하는 분명한 현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장학금은 현재 총액 9305억엔입니다만, 이건 미국의 10분의 1 이하죠. 요컨대 미국에서는 일본의 10배 이상의 장학금이 지급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중에는 급부형 장학금이 많습니다. 일본에서는 급부형 장학금이 개별대학이나 재단 등에 의해 지급되는 것을 빼면 거의 존재하지 않아, 많은 대학생들이 어쩔 수 없이 장학금을 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졸업 할 땐 많은 학생이 고액의 부채를 진 채 사회에 나가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이와사키 미노루(정치철학): 일본육영회의 장학금에 이자가 붙은 것이 나타난 것이 90년 전후였던가요? (고등교육 제도와 마찬가지로) 장학금에 대해서도 그 시점에 최초의 구조변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2004년에는 고이즈미 정권은 일본육영회 자체를 없애 버린 거죠.

오오우치: 빌릴 수 있는 액수가 늘어 빌리기 쉽게는 됐지만 그건 거액의 부채를 진 학생이 늘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대학원 중점화'에 의한 대학원생의 급증이라는 문제가 더해집니다. 대학원 중점화가 젊은 대학교원 자리를 늘린다는 고려 없이 도입된 것에 의해 대량의 오버닥터가 생겼습니다.

미즈키 쇼도씨의 "고학력 워킹푸어"에 나와 있는데로, 박사과정까지 계속해서 장학금을 빌릴 경우엔 600만에서 800만엔, 사람에 따라선 1000 만엔 가까이 부채를 지고 오버닥터가 되는 겁니다. 비상근강사로서 많은 수업을 맡아도 연수입 200만엔 이상을 버는 건 곤란하니까 거의 빈곤상태가 됩니다. 장학금 상환은 많은 학부 졸업생의 생활을 압박하고 있지만, 대학원생에게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니시야마: 저도 비정규니까 미즈키 쇼도씨가 2년 전에 출간한 "고학력 워킹푸어"는 획기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걸로 처음으로 대학원의 실태가 세상에 알려진 셈이죠. 문제의 배경을 말하자면 91년에 대학 심의회의 '대학원의 양적 정비에 대하여'라는 답신이 나오고, 10년 동안 대학원생의 수를 배로 늘린다는 결정이 났습니다. 그 결과 대학원생이 넘쳐나 현재 27만명입니다. 박사학위를 취득해도 일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1만 6000명입니다. 문제가 심각한데요, 그 이유는 대학원생이 소비자 취급 당하고 있다고 할까, 수업료는 꼬박꼬박 내지만 '출구'는 비참한 그런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재'의 부정적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은 정말 비참합니다.

올해 6월에 문부과학성이 '아무래도 대학원생이 너무 많았던 것 같다'라며 대학원생 정원의 삭감을 이번 중기목표로 설정한다고 하는 검토안을 냈습니다. 삭감이란 방침이야 그렇다 쳐도, 대체 뭘 문제로 보고, 어떻게 반성을 해서 문과성이 그런 방향전화를 하는 것인가라는 설명 없이 다음 목표를 내다니요. 그 점이 정말 화가 납니다.

미즈키씨가 최근 두번째 책인 "아카데미아 서바이벌"을 출간했지요. 이건 전작에 이은 '해결편'에 해당하는 건데, 제도적인 해결법이 아니라 아카데미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하면 좋은가라는 인생론을 써 놓았더군요. 좀 실망스러운 기술이긴 하지만 이건 또한 '고학력 워킹푸어' 문제의 심각함을 보여 주고 있다고 봅니다. 한편 이 문제에 대해 우시오기 모리카즈씨의 "직업으로서으 대학교수"는 정말 좋은 책입니다. 대학교원의 양성방법을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를 실증적으로 비교하면서 일본의 구조적 문제를 명쾌하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박사의 과잉 양산이라는 절박한 사태에 대해 그는 용감하게도 대학원의 일시정지를 제안하고 있지요.

문제는 대학원생이 너무 많으니까 줄이자라던가 대학원은 비참한 곳이니까 각자가 노력해서 인생을 헤쳐 나가자 같은 건 아니라고 봅니다. 사회가 대학원에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꿔야 합니다. 예를 들어 대학까지 가길 기대하는 부모는 70% 인 데 반해 대학원까지 가길 바라는 부모는 1% 정도입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보면 대학원의 석사까지 가고 나서 취직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닙니다. 특히 화이트칼라 층에선 고학력, 즉 석사학위나 박사학위를 가지고 사회에 나가는 예는 일본과 비교해 보면 일반적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고학력자도 우수한 인재로서 사회에 환원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오우치: 저는 대학원 박사과정의 정원 삭감에 대한 최근의 신문기사를 보고 화를 참을 수 없었는데요, 문과성은 마치 자기들은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듯이 굴고 있더군요. 오히려 자기들이 마치 오버닥터 문제의 피해자라고 된 듯한 어조였습니다.

그러니까 멋대로 '일본은 다른 외국과 비교해서 인구 당 대학원생 수가 적다'라는 이유로 대학원생을 늘려 놓고선 '최근 오버닥터가 문제가 되고 있으니까 줄이죠'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 동안 대학교원이나 연구자를 목표로 하고 있었음에도 그 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희생을 강요당하던 대학원생들은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빈까. 이건 정말 큰 문제입니다. 가장 문제인 것은 대학 측이 대학원생을 늘리고 싶다고 요구했던 게 아니라 문과성이 대학원의 정원 증가를 제안하고, 게다가 정원 증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강한 압력을 대학에 가했었다는 겁니다.

이와사키: 그 시절 문과성의 압력은 음험했죠. 대학원 정원에서 한 명이라도 비면 실질적인 추가모집을 통해 입시를 또 한 번 하지 않으면 안 됐어요. 국립대학은 암묵적으로 그 압력에 군소리 없이 따르게 됐지요.

오오우치: 명백히 강제였어요. 게다가 늘어난 대학원생의 진로나 취직자리를 준비한다는 대책이나 제도설계를 문과성은 거의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국립대학의 법인화나 18세 인구의 감소와 더불은 사립대학 교원 정리해고 등으로 대학원생의 취직 자리는 학문분야에 따라서는 줄어들기까지 했습니다. 이래서는 수요 공급의 균형이 무너져 모순이 심해지는 건 당연하죠.

그냥 외국의 데이터를 가져와선 일본과 비교해 인구비 대학원생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정원을 늘리고 예산에 의한 유도도 포함해 각 대학에 정원을 채울 것을 강제합니다. 취직자리를 전혀 준비하지 않고 대학원생을 늘려 놓고선 오버닥터 문제가 일어나니 이번엔 정원을 삭감한다고 하는 건 너무나 무책임한 거 아닙니까? 자신들이 만들어 낸 문제를 대학원생의 '자기책임'으로 처리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비열한 행위라 생각합니다.

이와사키: 어쨌든, 지금과 같은 국립대학의 종속적인 시스템과 풍토가 생겨난 핵심적인 이유는 법인화라는 설치형태가 아주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 (운영비교부금 삭감이) 어디에 영향을 미치냐 하면 결국 대학 교직이 줄어드는 겁니다. 특히 인문계 대학에서는 큰 기계나 설비가 있는 게 아니죠. 즉, 효율화 계수를 흡수하는 완충장치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건비율이 상당히 높으니 정년으로 퇴임한 교수의 자리를 채우지 않는다던가 어떨 수 없이 채운다고 해도 가능한한 싸게 채용하려 하죠. 거기에 무책임한 임기를 붙여서 고용한다던가 비상근 강사에게 떠넘긴다던가 합니다. [...] '고학력 워킹푸어'의 배경에는 그런 경비삭감정책이 있습니다. 게다가 국립대학은 이렇게 심각한 상태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사회를 향해 설명하거나 자기주장하거나 하는 일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

니시야마: 2004년 일본의 대학원생 수는 인구 1000 명당 1.9 명이었습니다. 미국의 경우엔 8.4명, 프랑스는 8.6명으로 이들 나라의 4분의 1 이하입니다. 대학원생의 수, 특히 인문사회과학계는 실은 더더욱 적습니다.

오오우치: 대학원생을 둘러싼 사회적 문맥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원생은 1993년엔 약 10만명이었는데 2008년에는 약 26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렇게 늘어난 대학원생은 어디에 취직하면 좋을까요. 고등교육 예산을 늘려 대학교원의 정수를 증가시키던가, 대학 밖의 연구기관을 충실하게 하던가, 아니면 고등학교 교원의 정수를 늘리던가 하지 않는 한 그들의 장래는 매우 곤란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을 간단히 예측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문과성은 거의 아무런 유의미한 대책을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그 책임은 중대합니다.

법과 대학원 문제도 완전히 같은 구조입니다. 연간 '3000명'의 사법시험 합격자라고 정책목표를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대학원을 허가해 버린 탓에 3000명을 훨씬 넘는 법과 대학원생이 생겼습니다. 게다가 법과 대학원 졸업생의 '8할 합격'이란 방침으로 시작했지만, 절대로 실현될 리가 없어요. 실현되려면 법과대학원의 정원을 4000명 이내로 했어야지요.

이와사키: 대학원도 법과대학원도 정책적으로 수치를 만지작거리는 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거기서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은 사람입니다. 간단히 조정하고 궤도수정할 수 없지요. 인생이 걸려있으니까요. 잘못하면 그런 사람들은 인생의 소중한 시기를 망치게 됩니다.

오오우치: 무책임하고 무계획적인 대학원 정책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심각한 상태로 몰아 넣고 있습니다. 법과 대학원의 경우엔 특히 지금까지 사회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이 일을 그만 두고, 한 가정이 생활을 책임 진 상태로 진학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변호사가 될 수 있다고 믿고서 고액의 수업료를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졸업할 때는 '변호사수가 너무 많고, 법과 대학원생도 예상 이상으로 많으니까 팔할이 아니라 삼할 만 합격할 수 있습니다'라고 최수 통첩을 받은 상황입니다.

이와사키: 나라가 하고 있는 부당표시상행위, 사기입니다.

오오우치: 그렇습니다. 명백히 국가적 사기입니다. 그리고 현재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 '공공정책 연구과'나 '비즈니스 연구과' 등의 전문직 대학원도 마찬가지 문제가 될 위험성이 높다고 봅니다. 출구인 취직 자리나 사회적 필요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대학원을 증가시켜도 영국의 사회학자 로날드 도아가 "학력사회 새로운 문명병"에서 논한 '학력 인프레'문제를 낳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독일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제 친구에게 들어 보니 독일에서는 지자체의 관리직 대부분이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일본처럼 대부분이 학부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경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학원 졸업이나 박사학위 취득을 한 사람에게는 그에 맞는 사회적 루트가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독일에서는 대학 이외의 장소에서 대학원 학위가 가치를 가지고, 사회적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회적 문맥이 있어 대학원을 증설하고 대학원생을 늘리는 거라면 좋습니다만, 일본 사회에서는 이과는 그렇다 치고, 문과계의 석사, 박사의 학위가 대학 이외의 장소에서 높은 가치를 갖는 것은 드뭅니다. 게다가 거의 유일하게 학위가 가치를 갖는 대학에 있어서도 대학교원의 자리가 충분하게는 증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에 세대간 격차란 문제가 더해져 자리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대학원에 진학한 원생의 '자기책임'으로 처리돼 버립니다.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사기입니다.

니시야마: 대학과 사회의 유동성에 대해서 입니다만, 사회인이 대학인이 될 가능성은 비교적 열려 있습니다. 특임이라는 자리에 의해 석사학위, 박사학위가 없어도 뛰어난 사회적 업적이나 분명한 업적이 있으면 대학의 교직에 앉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대학 안에서 높은 학위를 따도 사회에서 자리를 얻는 데는 엄연히 높은 벽이 있습니다. 이 대학과 사회의 불가역적인 인재의 유동성, 이것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자, 지금, 신자유주의적인 교육과 연구의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연구자는 수치화된 업적 경쟁을 거친 후 어떻게든 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COE 프로그램 같은 게 그런데, 저처럼 기간제인 신분으로 그저 잠시 버티기 위한 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런 경쟁을 거친 후, 대학에 채용돼 30대의 신진 교수가 대학에 들어간다고 해서 대학 그 자체의 활력이 재생산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 편, 학생도 수험 같은 수치화된 경쟁을 거친 후 대학에 들어옵니다. 이 두 경쟁에 의해 지친 학생과 연구자가 대학에서 만납니다. 이것이 재생산되어 가는 과정이라면, 제한 없는 지적호기심이라던가, 꼭 목적을 갖지는 않는 학문에 대한 정열, 연구교육활동에 있어서의 탐구열, 그런 대학의 핵을 이루는 요소에 근본적인 악영향이 있게 될 겁니다.

[...]


대학이란 무엇이 아닌가?


니시야마:
'대학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 자체가 지금은 아주 어렵습니다만, 그 이유는 독립법인화 이후 현저히 드러난 것처럼 대학이 다양한 스테이크 홀더에 의해 다원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원과 학생에 더해 사무원도 있고, 거기에 산업계, 지역사회와 다양한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대학이 성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해 졌습니다. 데리다는 80년대에 대학에 대해 사고했을 때, 현명하게도 '대학은 무엇은 아닌가라고 묻는 편이 좋다'라고 했습니다.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이념을 추구하는 것은 좋든 나쁘든 현재는 아주 곤란하니까 '어디까지 가면 더 이상 대학이 아니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세우는 편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대학이란 무엇인가'와 '대학이란 무엇이 아닌가'라는 것은 긍정명제, 부정명제의 앞 뒤이니 결국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가면 더 이상 대학이 아니다, 여기까지 가서는 안 된다 라는 한계를 예감하는 것, 또는 명시하는 것에 의해 모종의 저항의 뉘앙스를 가지고 대학에 대해 논하는 것이 지금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러면 대학의 이념이 있었던 시대, 적어도 '대학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하는 역사적 반성의 작업도 최근 나오고 있습니다. 우시오기 모리카즈씨는 "훔볼트 이념의 종언?"에서 바로 근대적인 대학의 이념의 근원인 훔볼트를 탈신비화한 형태로 비판적으로 독해하면서 현재 무엇이 남아있는가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또 제가 편집한 책으로, "철학과 대학"은 이전에 철학자들이 의기양양하게 제창했던 대학의 이념들로부터 대체 지금 무엇이 남겨질 수 있는가라고 물으며 선학들로부터 대학의 사고의 희망을 끌어 내려 한 논집입니다. [...] 유럽 관계로는 이케하타 지로씨의 "근대 프랑스대학인의 탄생"이 나왔고, 크리스토프 샤를르와 쟈크 베르제의 명저 "대학의 역사"도 곧 공간됩니다.

이와사키: '대학이란 무엇은 아닌가'라는 물음을 받았을 때 '이걸 하면 대학이 아니다'라는 경계를 니시야마씨가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니시야먀: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학은 인간의 삶을 가난하게 하지 않는 장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인 레벨에서도 실천적인 레벨에서도 삶 그 자체를 궁핍하게 하는 장소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교원 문제도 그렇고, 원생 문제, 학생 문제도 그렇고 많은 대학인이 사는 것의 곤란함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은 사무원의 문제로 5년간의 추가 고용 중지가 예를 들면 동경대학 등에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인간의 삶을 빈약하게 하고 궁핍하게 하지 않는 장소라는 것이 제게 있어서의 하나의 한계입니다.



볼로냐 프로세스와 유럽의 대학 해외 대학

잡지 <<현대사상>> 2009년 11월 '대학의 미래' 특집호에 실린 오카야마 시게루(岡山茂)의 <볼로냐 프로세스와 <<유럽의 대학>>> 이라는 글에서 발췌 번역한 글을 올립니다. 자료로 쓸 일이 있을까 해서 번역해 놨는데 아래 옮긴 부분을 제외하곤 그리 쓸만한 부분이 없어 이 부분만 추려서 올립니다. EU 의 대학교육제도 개선책인 볼로냐 프로세스에 대한 소개와 그 논리, 그리고 이에 연동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사르코지의 대학 개혁이 어떤 목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현 프랑스 대학 교수의 의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요즘 에라스무스 제도로 유럽에 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읽어 보면 현재 유럽 대학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에 대해 대충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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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대학교사로 구성된 자주단체 ‘알제레ARESER'(고등교육과 연구의 현재를 생각하는 모임)에 따르면, 대학, 그것도 학사과정은 무슨 ‘힘’을 손에 넣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대학은 ’세대 간의 비판적인 대결이 가능한 유일한 장소이며, 연애나 정치나 예술<<에 있어>> 다양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공간이자, 많은 젊은 남녀학생에게는 사회질서에 들어가기 전에 지식인의 생활을 다소나마 경험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이다. ‘볼로냐 프로세스’가 진행되고 있는 프랑스의 대학에선 LMD(학사를 3년, 석사를 5년, 박사를 8년에 수료할 수 있게 하기 위한 EU 차원의 학위 시스템)에의 대응에 쫓기고 있고, 그 와중에 L(Licencie=학사)만을 특화시키지 않을 수 없는 지방의 소규모 대학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어느 대학에서도 각각의 학과에 박사과정까지 있는 것이 원칙이니까 그것은 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을 시험당하는 위기적인 사태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프랑스에서 교사나 학생 사이에서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 또는 그들과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일본 대학의 ’학사과정구상‘을 위해 도임이 될지도 모른다.

1. 크리스토프 샤를의 ‘볼로냐 프로세스 비판’

올해 2월부터 7월 중반까지 프랑스에선 LRU(2007년 8월에 성립한 ‘대학의 자유와 책임법’)의 재검토나 폐기를 요구하는 학생과 교직원의 데모가 이어졌다. 알제레 대표 크리스토프 샤를(파리 제1대학, 역사학)에 따르면, 사르코지 대통령이 지금 추진하려고 하는 프랑스 대학개혁에는 다음 세 가지의 배경이 있다.

우선, OECD 도 추천하고 있는 ‘인정자본’이라는 논리. 그에 따르면 고등교육은 미래를 위한 투자이니 거기서 이익을 얻는 이들은 그 나름의 비용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배움을 통해 가능해 지는 미래의 보수를 학생에게 미리 지불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지출을 국가의 재정지출에서 ‘사용자’ 또는 ‘고객’ 쪽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공적부담을 적게하는 것이 가능하다.

(...)

두 번째는, 지의 경제라고 하는 논리. 그에 따르면 선진국에서는 산업의 공동화에 의해 일자리가 지적노동에 한정되게 되어 선진적인 분야 또는 높은 차원의 서비스 산업로만 일자리가 한정되고 있다. 따라서 그런 지적노동자를 양성할 수 있도록 고등교육을 재편하는 것, 그리고 그런 전망에 따라 대학을 변혁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사회에서의 그런 요청에 등을 돌리고 자신들의 지적 자율성에 매달리는 교원, 연구자는 그 안에서 대학집행부의 짐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학장에게 큰 권한을 부여해 그런 교원, 연구자를 배제한다. 이것은 LRU(‘대학의 자유와 책임법’)의 요점이다.

세 번째로, 미국 모델이라는 환상. 이 환상은 미국의 대학 현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선 말해두어야만 한다. 미국의 대학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갖는 것은 수천 개 있는 그 대학들 중 15 곳에서 20 곳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의 개혁가들은 미국의 고등교육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그들 대학에서 이상적인 모델을 만들어선 유럽을 그것에 맞추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미 이 환상은 1900년대부터 프랑스와 독일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지금도 지도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그것은 이 환상에 다음과 같은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① 민간 자본을 졸업생의 기부나 학생의 납부금이라는 형태로 빨아들일 수 있는 힘 ② 다른 나라의 엘리트나 발전도상국의 부르주아의 자식을 끌어들이는 국제적 명성, ③ 기업과의 연대나 정부와의 계약에 의해 기술적인 혁신을 추진하고, 스스로도 특허라는 형태로 몫을 맡아 얻을 수 있는 힘.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EU 가 공통의 정책으로서 추진하게 된 ‘볼로냐 프로세스’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유럽 고등교육 공간’에 있어 프랑스가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이 ‘프로세스’에 있어서 앞서 나가는 일이 불가결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르코지는 취임하자 곧 퓌용수상과 함께 대학개혁을 최우선의 과제로 한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볼로냐 프로세스’는 1998년 소르본느 대학에서 창립 800주년 축제가 열렸을 때,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의 교육대신이 고등교육 시스템의 유럽 차원에서의 통합을 추구하는 것에 합의한 것에서 태어났다. 그 1년 후에 볼로냐에서 열린 유럽교육대신회의는 소르본느에서의 이 합의를 받아 들여 2010년까지 ‘유럽 고등교육 공간’을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볼로냐 프로세스)을 발표했다. ① 유럽 건설에 지적, 사회적 그리고 기술적인 폭을 갖추는 것 ② 유럽 전체에서 공유할 수 있는 가치로서 21세기형 시민을 육성하는 것 ③ 학생과 교원의 자유로운 왕래를 가능하게 하는 것 ④ 유럽 고등교육 수준을 끌어 올려 글로벌한 경쟁에 맞설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이들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시책으로서 다음의 5 가지를 들고 있다. ① ECTS(European Credit Transfer System)에 의해 학생이 다른 대학에서 취득한 학점도 합산할 수 있게 하는 것 ② ‘에라스무스’, ‘소크라테스’ 등의 유학지원계획에 의해 학생과 교사의 유럽 레벨에서의 이동을 촉진하는 것 ③ ‘평가’에 의해 각 대학의 연구와 교육의 질을 보상하는 것 ④ 각국의 교육에 유럽적인 폭을 갖게 하는 것 ⑤ 삼년간의 제1과정과 기한을 명확히 하지 않은 제2과정으로 이루어진 학위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볼로냐 프로세스’는 2000년에 유럽이사회에서 ‘리스본 전략’이 채택되었을 때 EU의 고등교육 연구 정책으로서 정식으로 추진되게 되는데, 샤를에 의하면 EU의 정책으로서 채택되는 과정에서 본래의 목적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즉, 볼로냐 선언에는 가까스로 존재하고 있던 유럽 시민의 육성이라는 이념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세계화에 유럽의 대학을 적응시키는 것, 미국에 대항해 세계에서 유학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대학을 만드는 것이 우선시되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EU 헌법이 좌절되고, 그 대신인 리스본 조약도 쉽사리 비준되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 상황을 만드는 유럽 시민의 ‘저항’을 보지 않으면 EU의 현실을 알 수 없으며, 그런 식으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유럽 사람들의 지혜도 알 수 없다.

(...)

애시당초 유럽의 대학시스템을 일원화하려고 해도, 각각의 나라나 각각의 대학은 같은 출발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외부 세계에 열려 있는 북서유럽(영국,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제 국)과 (...) 70년대까지 계속된 독재체제 아래서 정체되어 있던 남유럽 사이에는 지금도 큰 차이가 있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는 그 중간에 있으며 특히 프랑스는 그 중에서 그랑제꼴 같은 엘리트를 위한 학교와 모든 고졸자에게 열린 대학을 갖기 때문에 마치 유럽의 현상을 만화경처럼 비추는 신기한 나라가 되고 있다고 샤를은 말한다. 미국 모델이 현혹된 엘리트가 있는 한 편, 국가가 지금까지 교육에 있어 져 온 중심적 역할에 집착하는 엘리트도 있다. 특히 후자는 국제적인 경쟁에 맞서는 것이 가능한 대학에서의 요구와 최근의 탈중앙화와 대중화에서 생겨나 이러한 과정에 있어 승산이 없는 대학의 불안 사이에서 찢기고 있다.

현재 ‘볼로냐 프로세스’는 ‘자유시장을 위한 교역권’으로서의 유럽에 대학을 흡수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대학을 살리는 것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샤를이 말하는 것처럼 유럽이 단지 ‘자유시장을 위한 교역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대학, 잡지, 신문을 통해 새로운 이념상의 공간을 창조하는’것이 중요하다. 행인지 불행인지 EU 예산은 한정돼 있어 그 대부분이 지역구조, 공통 농업정책 등에 돌려 지고 있어, ‘볼로냐 프로세스‘에는 그 야심에 걸맞은 예산ㅇ 없다는 게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돈이 들지 않는 ’새로운 이념상의 공간‘으로서의 ’대학‘을 유럽에 창조=상상하는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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